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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2022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요한복음 9장 24~41절


1. 오늘 묵상하신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4~34절은 ‘바리새인들’과 ‘눈을 뜬 사람’의 두번째 만남입니다. 35~41절은 예수님과 ‘눈을 뜬 그 사람’과의 두번째 만남입니다. 각각의 만남은 두번째라는 횟수는 같지만, 대화의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분위기도 다릅니다.

24~34절은 ‘바리세인들의 협박’과 그 협박에 굴하지 않는 ‘눈 뜬 사람의 담대함’이 드러납니다. 35~41절은 ‘다시 찾아와 만나주시는 예수님’과 ‘눈을 뜨고 다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감격과 믿음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마지막 단락(35~41절)이 부분이 ‘요한복음 9장’의 결론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된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지 않고, 1~12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소리 합니다. 말은 예수님에게 집중한다고 말하지만, 육신의 눈을 뜬 것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지는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심지어, ‘실로암’이라는 샘물이 영험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을 보면서 “내가 뭐가 잘못됐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어. 아니, 내 생각 반대로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해야 돼! 말씀을 잘 지킨다는 생각이 더 위험해!”라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돌아봄을 가진 사람이 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들’의 모습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니고데모(요한복음 3장)’ 외에는 없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하나만 말해보라면 이것일 겁니다. “저 분이 하시는 일을 보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것들이 틀린 것 같다…”라는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3. ‘요한복음 3장 2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33절과 같은 고백입니다. ‘니고데모’도 ‘눈을 뜬 맹인’도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 분이 메시야(그리스도, 구원자)가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생각한 메시야는 저런 모습이 아닌데… 무엇일까? 내 생각이 틀렸구나. ‘창세 이후로 맹인(죄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일(구원)’을 듣지 못했지. 맞아. 저분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야. 다시 만나야겠다. 다시 물어야겠다.”라는 영적 갈등과 충격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이런 것입니다. 자아의 옳음과 의로움으로 가려진 내 안에 어두운 부분이 성령의 비춰주심으로!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시는 은혜로! 그 어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의 본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4.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맹인’입니다.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 맹인’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맹인이 하나님을 더듬어 그려 놓은 것들입니다. 다 틀린 것들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화 된 기독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32절의 기록처럼 영적 맹인이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sign)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표지판(sign)입니다!

종교가 부추기는 자기 의로움에 속아넘어간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 내에 있는 바리새인들(절대 저 사람 아닙니다. 나입니다.)을 향해 안타까움으로 41절을 말씀하십니다.

41절 속에 담긴 뜻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맹인이면서 그저 더듬어 만진 것들을 보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보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맹인은 내 앞에 엎드려 죄 사함을 받을 것인데, 너희는 그러지 않는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나는 좀 본다. 나는 좀 안다. 나는 좀 낫다.’라는 마음이 있다면, 많이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예수님의 은혜로 겨우 맹인 벗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게 빛이 비추이지 않으면, 성령의 비추심이 없으면 눈먼 사람처럼 살게 됩니다. 이런 저를 붙드시고,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영혼의 고백이 떠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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