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월 16일 2022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요한복음 13:18~30절



1. 오늘 본문을 단순하게 ‘가룟 유다’의 배반이라는 주제로 읽으면 안 됩니다. ‘가룟 유다’라는 특정인물에 대한 비하와 비난에 휩싸이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는 어쩔 수 없었다. 예수님을 팔 운명이었다.”라는 식의 막연한 ‘운명론’에 빠진 해석과 적용을 조심해야 합니다.

‘운명론’에 빠진 해석은 대부분 ‘자기 의로움’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나는 긍정적인 일을 위해 선택 받았다. 또는 저들은 부정적인 일을 위해 선택 받았다.”라는 자기 착각으로 흘러갑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가룟 유다’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서 비난이 아니라, “주님, 오늘도 십자가 붙들지 않으면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라는 겸허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2. ‘가룟 유다’의 기록을 보면서 ‘배신’이라는 주제가 떠오르면 정말 잘 못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은혜,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신 십자가 사랑은 ‘가룟 유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20절은 모두를 향한 외침입니다. “나를 영접하라!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을 나, 예수를 영접하라!”는 말씀을 ‘가룟 유다’도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입니다! 파는 것까지 입니다!

팔고 난 이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보면서 “아, 저분은 랍비가 아니었구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진정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구나.”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했어야 합니다.

누구처럼 말입니까? 네,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닭 울기 전 세번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말입니다.



3. 우리는 자꾸만 비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것’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을 비교합니다. 무엇이 더 나쁜 죄인지 비교합니다.

그렇게 베드로의 죄는 용서 받을 만하고, 가룟 유다의 죄는 용서 받지 못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 참 많습니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우리 스스로 판단하려 합니다(물론, 성경에서 근거를 끌어오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나누려는 태도는 이미 자기가 조금이나마 남보다 더 의롭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동은 성경에 예언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성경을 빙자한 운명론적 생각에 머물 수있습니다.

하지만, 18절에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완성은 구약성경에서 계속 예언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4.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보다 더 큰 배신이 이미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리고,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탐했습니다.

혹시, ‘가룟 유다’ 본문만 읽으면 ‘누가누가 그런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배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신한 내가 보인다면, 제대로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전의 행위’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지금 회개하고 돌이켜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자살로 생을 끝낼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목놓아 회개하며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처럼…

‘가룟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아픔(21절)과 사랑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절).

사실, 범죄한 저에겐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있다고 착각할 뿐, 대상을 골라서 그런 비슷한 마음을 흉내 낼 뿐 예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물로, 사람을 향해 나를 끝까지 사랑해달라는 요구도 멈춰야 합니다.)

오늘 말씀 앞에 누구를 판단하기에 익숙한 제 자신 때문에 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 밖에 모르는 제 자신을 이끌어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그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를 장악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13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 2017 My Father's Church of NJ.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