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3장 1~17절
1. 요한복음 12장 이후의 기록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완성으로 집중됩니다. 그 첫번째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건과 현상 그 자체에만 서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더 명확하게 말씀(요12:23~36)하신 것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요12:27), 여전히 어리둥절하는 사람들(무리들)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 53장 1절,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에 대한 탄식과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끝까지 부르시는 예수님의 간절함입니다(요12:42~50, 요13:1).
하나님은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나!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저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구원 받는 지침서, 축복 받는 설명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비추는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내 심령을 말씀의 빛으로 비추고, 십자가에서 이런 나 대신 흘리신 피로 씻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내 모습이 섬뜩할 정도로 보여서 두려워야 정상입니다. 그 두려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새로움으로 이끄시는 은혜! 그 기쁨까지 이르러야 정상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이 마음을 가지고 계속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가 다르게 보입니다. ‘가룟 유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나의 이야기로 보여야 사람에 대한 막연한 비난과 저주를 멈추게 됩니다.)
오늘 읽으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를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으로만 이해한다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사건 앞에 반드시 이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끝까지 너희 발을 씻길 것이다. 너희는 내 앞에 엎드리지 않지만, 내가 너희 앞에 엎드려 너희 발, 너희의 죄악을 씻어줄 것이다. 끝까지!”
그렇습니다. 1절을 놓치고, ‘발을 씻으시는 사건’을 묵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를 놓치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사랑한 대상’에는 ‘가룟 유다’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포함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사도 요한’, 그도 몰랐습니다. 네, 예수님도 7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두들 다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완전 속죄를 경험한 뒤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3. ‘사도 요한’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 1절을 시작으로 ‘마지막 저녁 먹는 중(성경은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했는데, ‘최후의 만찬’이라는 거창한 표현이 소소한 마음을 가렸는지도 모릅니다.)’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는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아, 그를 향해 쏟아낸 말들을 멈췄어야 했는데. 그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과 눈초리를 버렸어야 했는데. 팔고, 도망친 사람 속에 나도 포함되는데. 예수님은 이런 나를 알고 계셨고, 이런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구나.”라는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목욕한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발 밖에 씻을 것이 없다는 말이 구원 받는 나는 그나마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그 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씻음을 받았다는 것이 생명으로! 죽음대신 주어진 생명으로 다가왔기에 오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이런 나를 씻으시는 은혜를 더 간절히 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것입니다.’ 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엎드려 간구하는 그를 예수님은 끝까지 붙드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에베소서 4장 13절)’하셨습니다.
4. 저와 여러분, 우리 서로 발을 씻기는 데까지 이르는 섬김, 사랑,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14절).
그러나, 이것은 내가 칭찬(?)을 듣기 위해 행하는 것도 종교윤리적 사명도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서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실 때,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통해 예수님께서 ‘서로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것이라 박수치는 나의 어떠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나는 십자가에 죽고, 오직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라고 생각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추켜세웁니다. 그럴 때, 빨리 도망가십시오. 숨으십시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 추켜세우던 사람들을 피해 숨으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요12:36).
저와 여러분, 우리 ‘뉴저지주님의교회’를 통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은혜!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