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9장 11~21절
1. 어제는 본문을 혼동했습니다. 전체를 살펴보고, 묵상하다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정해진 본문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는 목적이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 사사(Judge)였던 ‘사무엘’은 ‘그 때’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를 살아간 ‘사사들’과 ‘그들(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들을 본 ‘사무엘’을 통해 ‘사사기’를 기록하셔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네… ‘똑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 ‘사사기’ 속에 나타난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결코 다른 사람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첩을 찾으러 간 레위인’, ‘그를 선대하지 않는 베냐민 사람들’, ‘그를 선대하였으나, 용납될 수 없는(딸과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주겠다는…) 제안을 했던 한 노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아니 희안한(?)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가치관이 변했을 뿐, 결국 범죄한 인간은 자아의 만족과 자아의 임금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옳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만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리, 그 대속의 은혜’를 ‘좋은 것’을 얻기 위한 통과 의례(?)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체로 아래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일단, 믿으면… 완전히 만족할 수 없어도 뭔가 나름… 이 땅에서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얻어지는 것 같다 가도 생각해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령한 힘으로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적 존재를 거부하기에는 애매합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기독교’인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게다가 죽음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저 ‘입장권’입니다. 내세(죽음 이후)에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좋은 것’이 넘치는 ‘좋은 곳(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사는 막연한 좋은 상태를 누리기 위한 ‘천국 입장권’으로 ‘십자가 진리’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비유가 위험한 것입니다. 쉬운 설명과 관심을 끄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좀 딱딱하고 어려워도 죄인에게 베풀어진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그대로 묵상해야 합니다. 붙들고 고민해야 합니다. 영적 고뇌가 필요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간 ‘약속의 땅’, 가나안은 현실의 땅입니다. 갈등의 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대속의 은혜 안에만 구원과 진정한 복이 있다.’는 가장 이질적인 진리,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로부터 주신 언약!”을 붙들고 ‘갈등하며, 싸우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할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언약에 대한 믿음은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아지다 못해, 더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것’을 쫓아다닌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구별됨의 이유, 자신들의 존재 목적은 ‘너희는 죽었다.’인데, 종교 계급으로 전락했습니다. 물론, 원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인간의 악함은 생각보다 교묘하다는 것을 잊는 순간 모두다 저런 길을 갑니다.
17~19장의 ‘레위인’은 그저 ‘좋은 것’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처음엔 좀 쑥스럽게, 멋쩍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뭐 어때?’라는 마음, ‘다들 그러고 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에 속았습니다.
결국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첩의 아버지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함께 좋은 것을 즐기고, 마시고, 취하고, 늦게 출발했습니다(10절). 그렇게 22절 이하의 끔찍한 일이 거기(기브아)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저는 12절의 말이 너무 슬펐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면서 갑자기,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브아로 가겠다’라고 말하는 그의 이중적 태도가 무서웠습니다.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컷 내 맘대로, 내 기준대로 살다가… 성경의 잣대도 내 편리한 대로 적용하다가… 갑자기 자신에게는 후하게, 남에게는 냉정하게 적용하다가… 급하면 ‘신실한 척하는 저의 이중적 태도’가 보였습니다.
4.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이라면 찔렸을 겁니다. ‘첩을 맞이한 것, 첩을 데리러 간 것, 거기서 몇 일을 먹고 마시고 즐긴 것’이 말입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떠났습니다. 그렇게 갈림길에 다달았을 때, 본능처럼 떠올랐습니다. ‘이방인의 성읍’이라는 키워드가!
그렇게… “저리로 갈 수는 없지! 그래도 그렇지 ‘이방인의 성읍’에서 잘 수는 없지, 게다가 그들은 우릴 선대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기브아’로 가자! 역시, 이런 나를 보면… 난 괜찮은 사람이야.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구별된 사람이야. 보라고, 이렇게 수고를 하면서 저 이방 사람의 성읍’에 발도 들어놓지 않은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실 거야!”라는 자기 착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예배, 성경 묵상, 기도 등)의 모든 것이 이런 자기 착각의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더 떨리는 마음, 두려운 마음, 낮고 낮은 마음으로 살기 위해 십자가 붙잡고 발버둥 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발버둥’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것 조차도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예수가 한 것이라’ 는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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