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골로새서 4장 2~9절
1. 본문 2~4절은 기도에 관한 권면입니다. 5~6절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권면입니다. 7~9절은 ‘골로새서’의 전달자인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기도에 대한 권면 속에는 사도 바울과 그를 돕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요청이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감옥은 아니지만, 가택 연금을 당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한 내용은 놀랍습니다.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는 것에 대해 기도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상황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3절을 가만히 읽어보면 가택 연금된 상황이 전도(하나님 말씀 전함)에 더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생명의 비밀을 말하는 것에 막힘이 없기를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2.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봅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깨어 기도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되짚어봅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기도는 상황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상황 변화를 위한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되면 안 됩니다. 변화된 외부의 상황은 또 변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다양한 상황과 현실에 처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풀려나는 것만 적어도 3번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의 기록을 보면, ‘가이샤랴’에서 약 2년의 감옥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풀려나서 ‘로마’로 압송됩니다(AD 62년 경).
‘로마’에서 약 2년의 가택 연금 생활(행28:23)을 합니다. 그후 사도 바울은 풀려납니다(AD 63년 경). 비록,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성경 역사학자들은 그가 다시 풀려난 다양한 역사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석방된 뒤 그는 다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 네로의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는 AD 66년경에 다시 감옥에 갇히고, AD 67년에 사형당해 순교합니다.
3. 성경 기록 속에 나타나 ‘사도 바울’의 기도를 보면 상황이 변화되는 것에 대한 기도가 거의 없습니다. 그 상황과 현실 가운데에서 자신을 통해 일하실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자신의 ‘매임(구금의 상태)’이 장애물이 믿고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비밀(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완성)’을 말하는 것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말처럼 쉽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바울이니까 가능하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외부의 상황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겨울바다보다 더 다양한 일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일어난 어떤 상황이 바뀌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변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때 우리의 시선,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판단의 잣대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해야 합니다. 상황이 변하길 기도하기보다 상황을 바라보는 내가 변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5~6절은 단순히 전도하는 지혜 혹은 요령(?)이 아닙니다. “외인”으로 번역된 ‘exo’는 ‘외부(out, outward)’의 의미입니다. “아끼라(exagorazo)”는 ‘값을 주고 사다’라는 뜻입니다. “세월(Kairos)”는 ‘시간(지정된 시간)’외에도 ‘기회’의 뜻을 가집니다.
그렇게 5절은 “바깥에 대해서는 지혜(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야 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나를 변화시켜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문제를 바라보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 그 상황은 기회가 된다.”입니다.
4. 십자가에 매인 바 된 제 자신을 다시 묵상해봅니다. 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힘, 은혜 안에 갇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하는지 또 기도해봅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상황에 요동치는 제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제 자신의 가벼움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웃고, 싫어하는 일이 생기면 우는 그저 단순하기 그지없는 연약한 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그럭저럭 괜찮은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이 더해져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 없음의 상태!’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십자가 복음, 은혜의 시작입니다. 빛 없음에 대한 ‘극한의 절망’이 ‘절대 소망’인 십자가를 향해 내달리게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에 못 박힘, 성령의 임재 안에 갇힘,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음’이 참 기쁨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구속(救贖, redemption)’은 구속(拘束, restriction)이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그 은혜 안에 갇히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 갇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의 이끄심에 매인 바 된 참 자유의 삶을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매임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매임… 어쩌면 감옥보다 더 꽁꽁 붙들려 매임을 경험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감옥에 매임이 주는 압박과 자유 없음, 다가올 죽음의 공포보다. 십자가에 매이지 않으면 진짜 죽는다는 절박함이 더 큰 겁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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