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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빌레몬서 1장 1~16절


1. ‘빌레몬서’는 편지다운 편지입니다. 수신자인 ‘오네시모’와 ‘사도 바울’의 친밀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1~2절을 보면 ‘빌레몬서’의 수신자가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네 집에 있는 교회(골로새교회 성도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빌레몬’ 한 개인에게 집중됩니다.

‘골로새서4장 9절’이하의 문맥과 ‘빌레몬서 1장 12절’을 염두에 두고 보면 ‘오네시모’가 ‘골로새서(회람서신)’와 ‘빌레몬서(개인서신)’를 함께 들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2. ‘골로새 교회’는 독특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가서 복음을 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가 ‘에베소(두란노 서원)’에 있을 때, ‘오네시모’가 그곳을 방문하여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골로새’로 돌아간 ‘오네시모’는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오네시모’에 대해 성경의 기록 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레몬서와 관련된 주석 혹은 글들을 찾아보면, ‘오네시모’에 대해 ‘골로새 지역의 유력한 사람, 부유한 사람, 명망이 높은 사람, 큰 사업가 등’으로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 재력과 명망이 있는 사람이라야 자기 집을 교회로 내 줄 수 있고, ‘오네시모’같은 노예(종)을 거느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꼭 부유해야만, 집이 커야만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집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저택이 아니어도 됩니다. 엄청난 재력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십자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성경은 그의 재력 혹은 명성, 지위 등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네시모’가 ‘빌레몬’이 거느렸던 수많은 노예 중 한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명의 노예가 있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성경을 읽을 때 배경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딱 내 수준에서 그 말씀이 기록된 배경을 유추하여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미 우리는 ‘교회’에 대한 오염된 시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규모, 조직체 등이 교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조직 교회의 형태가 아닙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가정에서 모인 신앙 공동체, 생명 공동체였다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빌레몬’은 그냥 성도였습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변화된 삶을 살기를 발버둥 치는 한 영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재력가이건, 그가 재력가가 아니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거듭난 한 성도’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의 중심인물(?),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준 유력한(?) 성도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빌레몬)도, 나도, ‘오네시모’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아니었으면, 세상의 노예, 죽음의 노예였습니다. 옛사람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떨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 때문에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여전히 당신 심령에 떨림으로 남아 있다면, ‘오네시모’를 받아주시오. 십자가 복음으로 새사람 된 그를 영접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서 서로에게 굳어진 편견, ‘오네시모’에 대한 자기 생각을 버리자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4.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고정관념은 참 변하기 힘듭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거의 이 하나로 귀결됩니다. 자기 판단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의 옳음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과 같습니다.)

그럴 때, 내 심령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로움과 이익으로 기울어진 내 본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향한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자아로 기울어진 인간 죄성의 잣대로 평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글자 그대로 ‘유익’하기 때문에, ‘심복’이라고 불릴 만큼 자신에게 순종(입에 혀처럼…)하기 때문에 선처를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splagchnon’은 ‘심장, 간, 폐’같은 ‘장기(organ)’과 함께 ‘인간의 마음, 내면(inward parts)을 말합니다. 따라서 ‘심복(心腹, 심장과 배)’은 제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심복’을 ‘인간에게 충성(?) 혹은 복종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합니다. 그걸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그대로 가져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5. ‘빌레몬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하기 위해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십자가 때문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된 사람들이 ‘splagchnon(inward parts)’을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누군가의 외적인 상태, 옛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기보다 내면의 상태, 새사람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시각,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다시 보라고 권면할 수 있는 ‘사도 바울’과 ‘빌레몬’의 영적 관계가 부럽습니다.

그 부러움이 ‘뉴저지주님의교회’에서 다시 재현되길 기도합니다. 옛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새사람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섬기고, 영접하고, 용납하는 교회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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