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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16장 1~14절


1. 사사기 16장에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삼손과 들릴라’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 심지어 오페라의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꼭 이런 특정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여자를 통해 남자가 무너지는 사건(혹은 반대의 경우)는 인간 세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쉽게 교훈(?)을 발견합니다. 깊은 생각 혹은 묵상없이 자연스럽게 도덕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삼손 같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그렇지 않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덤으로 얻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역설적이지만, 버려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기생, 여자, 타락, 음란 등’의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가 주는 이미지, 도덕관념에 묶이면 안 됩니다. ‘나는 저런 짓은 안 한다.’라는 단순한 윤리판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음란, 타락’의 근원은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하는 순서를 정한 것 자체도 문제입니다. 간사한 인간은 그 순위를 때때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마음 두는 모든 것이 ‘음란, 타락’입니다.

더 심각하고, 교묘한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라서… 등등’의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자신의 본심을 가리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삼손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3절의 기록을 보면서 ‘블레셋 성문을 부수고 그 전리품(?)을 성스러운(?) 성읍, 헤브론에 갖다 두었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귀를 닫아야 합니다.

‘블레셋 중심 도시의 성문을 부쉈다’는 결과는 삼손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가사에 내려갔다면 그냥 부수면 됩니다. 새벽에 사람들 몰래 성문을 부숴야 했다면 노숙을 하면 됩니다. 노숙이 싫으면 마구간이라도 들어가서 밤을 지내면 됩니다. 기생의 집에 가서 ‘그에게로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작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그 일을 시작한 본심을 보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잡신들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의 존재가 자체가 선하십니다. 그 분의 시작, 그 분의 존재, 그 분의 일하심 등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됩니다.

인간의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결과의 어떠함을 보고 동기와 과정도 판단해버립니다.” 이것이 범죄 타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것이 잘 반영된 속담이 “꿩 잡는 것 매다.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안 통합니다.


3.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어쩔 건데…?! 하나님, 이렇게 라도 안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라는 식의 반응은 틀렸습니다. 그냥, “네 주님, 잘못됐습니다. 틀렸습니다.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삼손의 행동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생과 보낸 그 일을 덮기 위해 성문 짝을 땐 것이 아닐까? 때어낸 성문 짝들을 종교적 성지인 ‘헤브론’에 갖다 놓은 것은 아닌가? 그렇게 셀프 면죄부를 발행한 것은 아닐까? ‘난, 기생이 좋아 간 ‘가사(Gaza)’에 간 것이 아니라, 성문 짝 때려고 간 것이다. 봐라. 그래서 내가 성문 짝들을 헤브론에 갖다 놓았다. 우리 집에 들고 가지 않았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사람들의 비난도 피하려 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실제 사람들이 교회라는 종교시설 혹은 단체에 이렇게 기부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냥 좋은 일입니다. 좋은 것에서 끝입니다. 그것도 안 하는 사람에 비하면 낫습니다. 그런데, 그냥 거기서 끝입니다.

4. 사사기 16장으로 넘어올 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15장 20절의 표현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때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다른 사사들처럼 이방민족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년 동안 삼손이라는 ‘사사(Judge)’가 있었음에도 그대로 ‘블레셋 사람의 때, 그들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거대한 교회, 걸출한 목회자, 세상에서 유명한 종교인들이 넘쳐나는데 여전히 ‘세상 사람의 때, 그들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닐까요?’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면, 사사기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거의 전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삼손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으로 삼손처럼 객기(客氣, dutch courage)부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 그러네요. 삼손은 가사라는 이방인의 땅, 객지에서 쓸데없는 짓을 했네요…)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나귀 턱뼈와 주신 힘으로 말미암은 승리 혹은 축복에 도취된 삶을 살면 결국 삼손처럼 주신 것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 객기(?) 부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도가 지나쳐 영적 주정을 부리는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본인은 매우 기분이 좋겠지만…)

이 말씀 앞에 제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제 말이 삼손이 들릴라와 주고받는 말장난이 되지 않길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제가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가 아니라, 제 중심의 선한 동기를 보고 계시는 그 분 앞에 섭니다.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의 은혜에 가려진 바 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선한 것 하나 없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으로 덮어 주시는 그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립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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