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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21장 13~25절


1. 사사기의 마지막입니다. 사사기가 이번처럼 무겁게 다가온 적이 없었습니다. 사사기의 기록, 그들의 이야기 속에 제 자신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발견한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사기를 여전히 ‘그들’을 향한 말씀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이야기가 나를 향한 권면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돌이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돌이켜 행함이 없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잘라내는 결단이 없는 것은 성경의 진리, 십자가의 은혜를 영적 진통제 수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아픕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괴롭기 때문입니다.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엔 아팠는데. 돌이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집니다. 성경 지식이 쌓이면서 심령의 거울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바뀝니다. 적용의 대상이 ‘나’에서 ‘그들’에게로 변합니다. (저도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록, 그것이 지식으로 쌓여갈수록 자기 착각의 위험수위는 높아집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영적 타락의 사이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시간과 육체라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처음 마음’이 흐려졌습니다.

‘처음 마음’은 반드시 흐려진다는 것을 안다면, 회복과 돌이킴을 위해 죽을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새 생명 주심으로 허락된 날’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오늘 내가 못 박힐 십자가, 내가 붙들어야 할 은혜를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허락된 새 생명의 가치를 놓쳤다면, 우리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심을 폄하하면 곤란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도 똑 같은 실수와 교만을 반복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어제 돌이킴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요엘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절대 반복되는 돌이킴, 회개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반복에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3. 사사기 마지막,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의 전쟁(1:11)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할 건 다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묻기도 합니다. 늦었지만, 한 지파(베냐민)가 사라질까 염려(?)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묻는 본심이 무엇일까요?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까 걱정을 한 진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답은 나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물은 이유는 ‘자기 소견’이 맞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서 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대한 염려와 걱정은 베냐민 사람들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12지파라는 종교적, 혈통적 전통을 유지하려는(긍정적 의미가 아닙니다.)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남은 600명에게 여자를 공급(이런 단어를 사용해서 민망합니다.)하려는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남은 600명에게 여자를 공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답은 ‘민간인 학살(사사기 20장 48절)’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베냐민 남자 600명이 ‘림몬 바위’로 피신한 4개월 동안 잔혹한 민간인 학살과 거주지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맹세도 했습니다. 말도 아닌 맹세(21장 1절 이하)! ‘입다의 서원’만큼 황당한 맹세를 지키느라 ‘야베스 길르앗 주민도 학살’했습니다.


4. 제 개인적으로는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서늘할 정도로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나에게 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있느냐? 이미 너 스스로 결론을 낸 것이 아니냐? 그 결론을 얻기 위해 나의 능력이 필요한 것 아니냐? 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냐? 다시 봐라! 나에게 물었으나,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봐라!”라는 영혼의 깊은 곳의 음성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미, 결론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 결정지은 어떤 결론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묻는 것, 기도하는 내용은 ‘좋은 방법’에 대한 기도입니다. 획기적이고, 효과적이고, 신비스러운 기막힌 방법을 찾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물어야 했던 것은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울까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여기서 베냐민과 싸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라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물어야 하는 지경까지 온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베냐민과의 전쟁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께 묻지 않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을 불량배를 내놓지 않는 것을 핑계로 베냐민 지파 전체와 전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없으십니까? 하나님께 그것이 옳은 지 그른 지를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알기 때문일 때가 없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래서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도망가려는 제 마음을 다시 십자가에 붙들어 맵니다.’ 그것이 진짜 기도이고, 그것이 제가 사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 진짜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번 해 보십시오. 놀라운 일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 뼛속 깊이 체험하실 것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고, 내 생각 반대로 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 그가 진짜 거듭난 그리스도인! 십자가에 못 박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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