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6장 1~11절
1. 솔로몬이 ‘왕이 된 것, 성전을 지은 것,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을 조금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가 분리된 국가인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인 솔로몬이 ‘낙성식’을 주관할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3절에 기록처럼 ‘얼굴을 돌려 온 회중을 축복’하는 것은 ‘대제사장’이 하는 것입니다. 더 엄격하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향해 그 얼굴을 드시고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민수기 6장 ’에 ‘대제사장의 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위임하신 일을 굳이 자신이 합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온 회중을 향하여 마주 서서 손을 펴고 기도합니다. (12절)
이걸로 ‘축도권은 목사에게만 있다.’이런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위임된 것 외에 억지로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제발,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라는 등의 말로 솔로몬이 행하는 것을 두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참 많이 달랐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항상 ‘회중들 가운데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배 드렸습니다. 그걸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는 왕으로 선 것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통해 가려주시는 은혜를 입은 죄인으로 섰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삶을 통해 예배 드리는 마음의 자세가 다윗 같습니까? 솔로몬 같습니까? 늘 점검해야 합니다.
2. 두번째, 11절… 짧다면 짧은 이 기록 속에 하나님께서 ‘내가, 내’라고 표현하신 것을 제외하고, 솔로몬이 자기를 지칭하는 ‘내가, 나’라는 표현이 무려 7회 등장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이것도 ‘솔로몬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우리 제발, 이런 말은 하지 맙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를 강조하도록 하셨다. 성전을 지어드린 축복받은 솔로몬은 그래도 된다.”라는 생각은 버립시다.
역대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의 시각보다 더 객관인 성령의 감동으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이나 행위에 무조건적인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보다 그 말을 한 솔로몬도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봐야 합니다.
저는 8~9절을 보면서 ‘밧세바의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솔로몬의 상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왕세자다! 아버지도 짓지 못한 성전을 지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다윗, 그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언제나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네 허리, 네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했습니다. 단순한 ‘내 다음 자녀, 손자, 후손’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지으시는 진정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속사에 근거한 영적 시각입니다.
이것이 거창해 보이십니까? 나와 별 상관없어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허락된 것들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는 삶을 살도록 베풀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3.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에게 그토록 많은 부와 명예를 주신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을 솔로몬은 잊지 말았어야 합니다. 바로, ‘대속의 은혜로 가려주시고, 덮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네,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의 “캄캄한 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아라펠(araphel)’은 ‘어둠, 캄캄함’이라는 뜻도 있지만, ‘구름, 짙은 구름’입니다. 즉, ‘어둠, 캄캄함’이 있는 이유는 ‘짙은 구름’이 내려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구름이 뒤덮여 가려진 캄캄함’을 말입니다. 범죄한 인간, 그들의 죄악을 친히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그 캄캄함 가운데 오직 하나님과 나만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심령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누구에게도 드러나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본성과 죄성이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가려지고, 덮여진 은혜를 말입니다.
어쩌면,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체험했던 덮어주시는 은혜를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왕이 되는 순간 “드디어, 마침내 하나님이 내 손을 들어주셨다. 왕으로 등극했으니, 이젠 내 출생을 가지고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받은 축복, 내가 지은 성전을 봐라. 이것이 은혜입은 자의 결과물이다.”라는 그릇된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요?
더 안타까운 것은 솔로몬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을 은밀하게 만나주시고, 포근히 덮어 주심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4. 또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막’이었다면 어땠을까? 성막은 구경할 것이 없습니다. 성막은 대속의 은혜를 믿고 제사 드리는 사람 외에는 오지 않는 곳이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성전’은 달랐습니다.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히스기야 시대의 바벨론 사절단’입니다. (열왕기하 20장 12~21절)
‘바벨론에서 온 구경꾼들과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은근히 자랑하는 히스기야’를 떠올려보십시오... 섬찟할 것입니다.
오늘이 지금까지 나눔 중에서 가장 길었습니다. 제 마음이 많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나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최고의 축복, 은사, 달란트 등이 무엇이냐? 그것을 가장 조심스럽게, 가장 두려움으로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네 스스로 왕이 되는, 심지어 신(神)이 되려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사실 더 아픈 고백이 많은데 덮어두려 합니다.)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시는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체험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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