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2020년 수요일 묵상
- Hyung Yun
- 2020년 11월 4일
- 2분 분량
본문: 역대하 4장 1~22절
1. 옷을 바르게 입기 위해 강조하는 ‘첫 단추’의 중요성을 생각해봅니다. ‘축복과 영광’이라는 단어에 취해 ‘솔로몬 성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사람과 ‘성전’이라는 건물에 마음을 빼앗겼었습니다. 신격화, 성지(聖地)화의 오류에 빠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를 위한 대속의 제사’를 망각했습니다.
“옛날에 쓰던 자(ruler)”를 가지고 성전의 크기를 짐작하듯, ‘십자가의 자(ruler)’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역대하’와 성경 전체를 봐야 합니다.
역대하 4장에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건, 그 중에서도 제사를 위해 필요한 기구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1~6절은 ‘성전 뜰에서 사용하던 기구들’입니다. 7~8절은 ‘성전 내부에서 사용하는 기구들’입니다. 9절은 ‘문짝’에 대한 내용입니다. 10절은 ‘바다(Sea of cast metal)’의 위치입니다. 11~17절은 ‘후람(두로에서 온 놋 기술자)’이 만든 ‘놋 조형물과 기구’에 대한 설명입니다. 17절은 ‘후람과 기술자들’이 놋을 제련한 장소입니다. 18~5장 1절은 ‘솔로몬’이 이룬 ‘최고급, 최신식 기구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2. 인터넷 검색 엔진(Google)에 ‘솔로몬 성전’이라고 검색을 해보시면, 3~4장에 기록된 것을 사진, 그림 혹은 3D로 재현한 것들이 나옵니다. (열왕기상을 살펴볼 때 보여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규모와 위용, 화려함이 대단합니다. 약 3000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후람의 놋 가공 기술은 최첨단 정밀 가공 기술이었습니다. 말이 성전의 내벽과 문을 금으로 입히는 것이지, 실제로 본다면 그 화려함에 압도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질문해봅시다. 이런 고급 디자인의 최첨단 건축물이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까? 성전이 필요한 진짜 목적인 ‘속죄의 제사’를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요?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성전 설계에 관한 것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딱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성전 본래 기능과 목적에 맞는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솔로몬이 제작한 초대형 물탱크(바다)는 필요했습니다. 12개의 ‘물두멍’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성전의 크기가 커야 할 이유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이스라엘의 인구도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굳이 ‘바다’를 떠받치는 ‘12마리의 황소(3~4절)’를 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갖은 장식으로 꾸며진 초대형 기둥이 필요했을까요? 성전 내부와 문을 순금으로 입힐 이유가 있었을까요?
혹시, ‘12마리의 소’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좀 억측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황소’는 애굽을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 우상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출애굽의 금송아지가 떠오릅니다. 거대한 놋 기둥은 이방신전에도 있었던 것들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성전 본래의 존재 이유에서 너무 멀리 나가버린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황소’를 새겨 넣고, ‘거대한 기둥’을 만든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내 죄를 대신해서 드린 대속의 제물’이 완전히 ‘불 타오르는 연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붙드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돌이키고, 회개하고, 내려놓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11절의 “이와 같이 후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할 일을 마쳤으니”라는 기록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이것이 얼핏 보면 “후람이 성전을 최선을 다해 만들었구나…” 정도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원어적 의미를 부각해서 해석을 해보면 좀 달라집니다.
“후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모든 일을 하였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결국, 후람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 화려한 기술로 성전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뒤집어 말하면, 솔로몬은 누구를 위해 성전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오늘은 결론을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실, 덮어놓고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 돌린 솔로몬, 그를 축복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편합니다. (단편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전체를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은 ‘종교 클럽, 종교 취미 등’의 활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기에 죽을 것 같은 고민과 갈등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들고 ‘진리와 생명’을 향한 갈망을 통해 참된 하늘의 축복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