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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사사기 14장 1~20절



1. ‘사사기’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아는 그 사람, ‘삼손’의 이야기로 들어왔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삼손’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들릴라’라는 여인과 관계된 사건(16장 이후)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만 봐도 ‘과연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물론, ‘삼손’ 이야기에 대해 이런 해석과 관점도 있습니다. ‘삼손은 고독한 사사였다. 블레셋이 두려워 아무도 삼손을 도와 블레셋에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홀로 블레셋과 맞서 싸운 고독한 사사였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만난 “기묘자(13장 18절)”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합니다. 이런 해석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하나님을 만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의 삶,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방법(?)’입니다.


2.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삼손’을 무조건 통제불능의 망나니(?)로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삼손’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말하는 것도 안 됩니다.

‘삼손’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렇게 사는 나, 하나님께 받은 수많은 것들을 엉뚱한 것을 위해 쏟아붓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삼손’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근거로 되는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가 그가 힘을 쓸 때 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가 오늘 본문 4절입니다. ‘부모 조차도 이 일(결과적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 알지 못했다’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4절입니다. 한국어와 너무 거리가 먼 고대 히브리어의 특성, 그 번역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4절을 번역할 때 원문의 순서와 다르게 했습니다.

제가 참고한 주석과 성경번역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것이 여호와께로 나온 것인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가 블레셋에 대항하여 기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렇게 직역을 해놓고 보면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었던(“틈을 타서”)’ 주체는 ‘삼손’보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3. 두번째, 6절의 “여호와의 영(Spirit)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때만 함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삼손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때는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비상이었습니다.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 죽게 생긴 상황입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은 특별한 도우심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삼손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그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고 그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난 너를 돕는다. 제발, 나에게 돌아와라. 원래 나실인의 모습을 갖춰라.”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자의 시체’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합니다. 같은 길을 가다가 ‘꿀’이 있어도 꼭 먹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죽은 사자의 몸에서 생긴 꿀’이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 주어서도 안 됩니다.

‘꿀’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하나님 말씀’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영적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에 가까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삼손의 경우처럼 성경 인물의 행동에 면죄부를 주려 합니다. 그렇게 자기도 그 면죄부를 복사해서 한 부 가지려 합니다.

다시 ‘사자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삼손은 기억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와 여전히 함께 하시는 구나. 이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구나… 대체 나는 무엇을 하러 ‘딤나’로 내려가는 것인가?”라는 영적 질문 앞에 엎드려 기도했어야 합니다.


4. 가끔 ‘삼손의 결혼’을 ‘위장결혼’으로 말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묘한 수를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애매하고, 교묘하고, 간사한 일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베옷 삼십 벌, 겉옷 삼십 벌’ 갖다 주겠다는 핑계로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인 것을 무턱대고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19절에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임했다’라는 기록 때문에 삼손의 행위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애매한(?) 행동’이 아니라도 블레셋을 물리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납시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힘이 강해진다.”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 성령’이 임하면 힘만 세지는 것이 아닙니다.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을 때, 가장 중요한 현상은 ‘엎드림’입니다. 13장 21절 이하에도 잘 드러납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 ‘마노아’, 그제서야 여호와의 사자인 줄 깨달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게 된 이유는 ‘여호와께서 예배’를 받으셨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애매한 방법 앞에서 다시 엎드려 물어야 합니다. 그 애매한 것을 행함으로 얻은 결과물과 그 애매한 것을 내려놓음으로 얻은 결과물이 같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욕심을 버리면 하나님의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옳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것은 여호와의 마음이 내게 임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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