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0장 1~18절
1. 사사기는 영웅을 소개하는 성경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인물 중심의 해석에 빠지면 오늘 본문의 ‘돌라, 야일(1~5절)’같은 사사는 그냥 넘어갑니다. 이름 조차 관심이 없던지, 성경 시험에 고난이도 문제로 등장하는 소재(?)로 사용합니다.
때로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4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당시 엄청난 고가의 교통수단인 ‘나귀’와 자기 소유의 ‘성읍’을 물려주었다는 것은 ‘사사, 야일의 시대’가 풍요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30명의 아들들이 있었다는 것도 자녀의 축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아들이 30명이면, 딸은 없었을까요? 게다가 한 아내에게서 아들만 30명을 낳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2. 제가 함부로 ‘사사, 야일의 시대’를 ‘풍요와 축복의 시대’였다는 해석을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해석이 시작된 본인의 마음 상태와 그 해석대로 살아가는 삶의 열매는 본인의 책임이니까요.
저는 ‘사사, 야일의 시대’가 ‘풍요의 시대’였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에게 관심은 ‘그 풍요의 시대 이후’입니다. ‘주어진 풍요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인물 중심’의 단절된 해석에서 벗어나보십시오. ‘야일’과 ‘입다’는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야일’이 어디 사람입니까? ‘길르앗 사람(3절)’입니다. 네, ‘입다’와 같은 고향 사람입니다. 여기에 큰 단서가 있습니다. (주일예배 말씀 나눔을 더듬어 보십시오.)
내일 읽으실 본문인 ‘사사기 11장 2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집에서 쫓겨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려는 형제들’ 때문입니다.
‘사사, 야일’과 ‘사사, 입다’의 관계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해석처럼 ‘사사, 야일의 시대’가 ‘풍요와 축복의 시대’였다면, 같은 ‘길르앗 지역’에 살았던 ‘입다’의 가족들도 부유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풍요와 축복의 시대’를 지나며 ‘풍족함과 부유함’은 쌓이고 또 쌓였을 것입니다.
3. 하지만, 중요한 것은 ‘풍요와 축복이 임한 이후’입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단순히 ‘입다의 가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사, 야일의 시대’, 그 태평성대(太平聖代, the prosper era) 22년을 지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정확히 한 세대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6절 이하의 안타깝고, 속상하고, 답답하고, 아픈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말하기도 민망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6절의 ‘여호와를 버렸다.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을 더 엄격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종교행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이방신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우상처럼 섬겼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관념일 뿐입니다. 과거 조상들이 지켜오던 종교행위(제사)를 함으로 ‘어떤 좋은 곳’에 가는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뭔가 좋은 것을 준다는 존재가 있다면 다 따라 갔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건, ‘각 종 이방신’이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광야보다 가나안이 좋았을 지 모릅니다. ‘우상 백화점, 우상 전시장, 우상 쇼핑몰’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영혼의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이후의 구원, 그들이 말하는 ‘파라다이스’ 조차 인간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 탐욕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우상(사탄의 전략)입니다.
4. 저는 사사기 속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10절)을 볼 때마다 무섭습니다. 아니, 부르짖어 기도하는 저를 생각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정말, 그것이 진심인가? 또 입버릇 아닌가?’라는 마음 때문에 말입니다.
16절의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를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곤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amal’은 ‘고통, 문제, 괴로움 등’의 뜻도 있지만, ‘사악함, 부당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심”으로 번역된 ‘kawtsar’는 ‘불쾌한 것을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화가 나는’의 뜻입니다. (주일예배 때 함께 나눈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가만히 묵상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태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알면서도 다시 건져주셨습니다. 인간의 알량한 부르짖음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알면서도 다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내가 다 알지만, 그래도…’라는 예수님의 탄식 섞인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래도 십자가로 나아오라.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가 널 위해 죽었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제대로 들었다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지 못 합니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입니다. 엎드린 몸을 뒤틀어 방향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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