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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2020년 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역대하 2장 1~18절


1. 말씀 드린 대로 11~12월은 ‘역대하, 베드로후서, 시편 40~44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역대하’는 ‘역대상’과 함께 한 권입니다. 원제목은 ‘시대의 사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학자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정설입니다. 기록목적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좁게는 남유다인들)에게 종교적,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남유다의 왕들’을 중심으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다 인정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의 혈통이 아닌 왕들이 다스린 북이스라엘, 솔로몬에 대한 반역으로 건국한 북이스라엘에 비하면 다윗의 혈통을 유지한 남유다에게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역대상하’의 기록목적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와 그의 동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대상하’를 기록했다면 정말 그런 식의 ‘종교심,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기록한 것일까요?

앞으로 살펴보시겠지만, ‘역대기’는 일종의 반성문입니다. 다윗의 위대함, 솔로몬의 영광,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에 취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를 통하여 베푸신 ‘대속의 은혜의 본질’을 내동뎅이 친 자신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이런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킨 하나님의 신실하심, 긍휼히 여겨 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도 이런 ‘겸허한 시각’으로 ‘역대상하’를 읽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는 고사하고, 그들이 겪은 ‘영적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인 ‘역대하 2장’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솔로몬이 받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당대 최고의 건축자재와 기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렸다.’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윗(아버지)과 두로왕 후람(아버지)’의 관계와 ‘솔로몬(아들)과 두로왕 후람(아들)’의 대를 이은 아름다운 협력 관계(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값비싼 건축자재와 그것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할 최고의 기술자들입니까? 아닙니다.

2장의 중심은 6절입니다. 솔로몬은 끝까지 6절의 고백을 잊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솔직히는 6절의 고백이 그냥 말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6절은 참으로 닮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역대상 29장 14절’에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와 너무 닮았습니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의 고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고백이 그저 들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면 어쩝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다윗의 후계자다’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면 어쩝니까?

물론, 저의 지나친 염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아버지로 둔 저희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3. 오늘 본문 전체에서 6절이 없다면, 그저 ‘성전 짓기 위한 최신 기술 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6절, 특히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라는 솔로몬의 고백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전이 있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분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타르(qatar)’는 ‘희생의 제사를 드리다’입니다. 더 직역하면 ‘뭔가를 대신하여 죽을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성전’이 있어야 하는 목적입니다. 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덧입기 위해 ‘희생의 제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화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성전에 금칠을 해야 합니까? 그 비싼 백향목으로 지어야만 했나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며 ‘야긴과 보아스’라는 당대의 첨단 기술로 지은 ‘두 기둥’이 필요했을까요?

제가 너무 비판적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혹시, 자기가 거할 ‘화려한 궁궐’을 건축하기 위해 기술자를 훈련시킨 것인가? ‘화려한 궁궐’을 짓기 전에 ‘성전’을 지어야 남들의 비난과 솔로몬 속에서 올라오는 ‘찔림’을 피하기 위해 ‘성전’도 그럭저럭 화려하게 지은 것은 아닌가?”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실제 ‘열왕기상 7장’의 기록을 보면, 솔로몬 궁전의 규모가 더 컸습니다. 건축기간도 거의 2배였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 ‘솔로몬’에 대한 신격화(?)를 멈추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가 받은 세상의 축복,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인 ‘대속의 은혜’와 혼동하지 말자는 것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과 규모’보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자리 즉, ‘모리아 산’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신 ‘대속의 은혜’가 서려 있는 ‘모리아 산’에 집중할 때 진정한 ‘십자가 복음, 생명의 복음’이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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