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8장 22~35절
1. 성경은 그대로 기록합니다. 한 사람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 그 이후의 삶’입니다. ‘위대한(?) 승리 뒤, 그 사건 이후, 쓰임 받은 다음, 그가 걸어간 발자취’를 그대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에 대해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냉정하리만큼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이 생각을 내려놓고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이 그랬을 리 없다!”라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성경에 기록된 대단한 인물 포함) ‘이 땅에서 쓰임 받았다’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말 그대로 그때 뿐입니다. 지나간 것입니다. 그 지나간 것이 현재를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쓰임 받은 뒤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구원 받은 것 만큼 중요한 것이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인 것처럼 말입니다. 네, 전적이 은혜로 얻은 구원, 그 구원의 능력이 이끄는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이후의 삶, 성화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여전히 십자가 은혜에 붙들려있구나! 주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구나! ’라는 영적 자각이 진정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2. 오늘 본문은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갈등은 아닙니다. 서로 신났습니다. 이렇게 기쁜 날이 없습니다. 축제였을 것입니다.
22절의 “그 때에”를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생각하지 마시고 앞의 21절을 그려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적의 우두머리(세바, 살문나)를 마침내 죽였습니다. 진짜 전쟁이 끝났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던 미디안을 마침내 꺾었습니다.
누가 꺾었습니까? 네, 우리의 정해진 답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바로, ‘기드온’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눈 앞에서 적장을 칼로 죽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기드온’입니다! 이걸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눈과 이성, 감정을 가진 인간의 연약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도 “그때”에 칼을 빼 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칼로 적장의 목을 내려치는 행위(performance)는 하면 안 됩니다.
3. ‘기드온’은 이미 넘어졌습니다. 21절의 ‘세바’와 ‘살문나’의 말에 부추김을 당한 것입니다. “s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는 교활한 말을 듣고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로 승리한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에 재를 뿌린 것입니다. 칼을 휘둘러 그들을 죽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전쟁영웅’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무서움은 미디안 대군을 몰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아를 드러내게 하는 간사한 말, 간교한 부추김’이 무서운 것입니다. 딱 마귀 사탄이 한 짓입니다.
사탄 마귀의 간교함은 이것입니다. 무서운 것으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무서움 혹은 공포심을 주는 것은 사탄 마귀의 단순전략 입니다.
악한 영의 고차원적 전략은 자아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자아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은 자아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추김 당하고, 유혹당하면 인간은 움직입니다. 자신의 손에 있는 칼을 휘두릅니다. 갖은 정당성을 부여하며 칼 춤을 춥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와 육체를 이용해서 ‘선악과’를 움켜쥐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을 거절하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되기 위해 ‘선악과’를 삼킨 것입니다.
4. ‘기드온’에게 ‘세바’와 ‘살문나’는 ‘선악과’였습니다. “그 때”, 자기 손으로 그들을 죽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대적을 살려 보내란 말이냐?!”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꼭 내가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명분이 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기드온’이 칼을 휘두르면,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의 방법(항아리, 횃불, 나팔)이 퇴색됩니다.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에 ‘칼’이 각인됩니다. ‘전쟁 영웅’만 남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다스리라(22절)’는 백성들의 요청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다(23절)’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참 아리송한 말입니다. 23절의 말과 그 이후의 행동이 전혀 일치가 안 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24절의 기록처럼 ‘귀고리’는 왜 요구한 것입니까? 좋습니다. 요구해서 받은 것까지는 그렇다 치겠습니다. 대체, 27절의 ‘에봇’은 왜 만든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음란하게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에봇(종교 예복)’을 섬기도록 만든 것입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말이 내 삶을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생각은 얼마든지 근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도 그럴 듯하게 내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손에는 칼이 있습니다. 손에 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휘두르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엉뚱한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22절의 황당한 소릴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드온’이 실수(?)로 ‘에봇’을 만들어도 그것을 ‘음란하게(두 마음으로)’섬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항아리, 횃불, 나팔’을 통해 참 승리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맡겨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맡겨 드리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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