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7장 15~25절
1. 이제 ‘기드온’이라는 걸출한 성경의 영웅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300이라는 숫자, 위대한 승리라는 수식어가 떠오르기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기드온’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 ‘기드온’이 끝까지 붙잡아야 했던 여호와 하나님! 잘 되기 위해 붙들리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붙들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라는 영혼의 절박함을 가지고 ‘기드온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드온 이야기’를 영웅 열전으로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까지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여러 번 읽고,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조차 ‘대승리’이후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시작보다 마무리가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인지, 기드온의 민 낯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2. ‘기드온 이야기’의 핵심을 붙잡기 위해서는 ‘승리, 성공, 쓰임 받음 등’의 단어를 내던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분해(?)하여, ‘승리를 위한 3요소(항아리, 횃불, 나팔)’이라는 식으로 요약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내 삶에 기적같이 임하여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종교적 공식(무속적 요령)을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기드온’은 꿈을 통해 영험한 계시를 받아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도 엉뚱하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3~14절을 잘 읽어보면, 미디안 사람 중 한 사람이 꾼 꿈을 그 친구가 해몽한 것입니다.) ‘나팔, 항아리, 횃불’은 ‘승리를 위한 비밀병기(?)’가 아닙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사람들(‘용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에는 ‘용사’라는 표현이 없습니다.)은 죽으러 간 것입니다.
왜 이런 묵상을 했을까요? 제 심령에 왜 이런 음성이 울렸을까요? 이유는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방법, 하나님께서 이기시는 방법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그렇게 진정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조금만 진지하게 내가 300명 중 한명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실낱같은 희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살수도 있다’라는 가느다란 바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짓누르는 절대적인 영혼의 상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비집고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들을 전쟁터 한 가운데 우뚝 설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패할지언정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나는 죽을지언정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라는 믿음이 그들을 미디안 진영 한 가운데로 이끈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21절의 기록처럼 각기 제자리 서있었습니다. 횃불과 나팔을 든 채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투의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횃불을 들었다고 훤히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칠흙같은 어둠에 횃불을 들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과녁이 되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당황한 적이라도 그 중에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300명의 위치를 가리켜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전쟁터’입니다.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복음의 나팔, 성령의 횃불’을 들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주목과 시선을 끄는 일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말을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의 횃불을 든 내가 가장 잘 보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신앙 좋다는 평가를 듣고 싶고, 듣는 사람이 있다면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잘 드러납니다. 가장 잘 보입니다.)
우리, ‘십자가 복음의 빛, 성령의 빛’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그 빛이 드러나기 위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20절)는 사실에서 또 한 걸음 나가봅시다.
‘십자가 복음의 빛’이 나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내 본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나의 추악함, 나의 본 모습, 나의 위선 등등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에 그런 나를 안타까움으로 묵묵히 기다리실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드러난 나를 보며 두 종류로 나눠질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제한적 도덕심으로 참아 주는 사람입니다. (저를 향해 첫번째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 많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도 첫번째 마음을 달라고,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도 십자가 복음의 빛 앞에 드러난 끔찍한 제 모습 때문에 소스라칩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7절)라며 십자가로 부르시는 그 음성을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빛, 그 비춰 주심 앞에서 더욱 낮은 마음, 긍휼을 구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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