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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2020년 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고린도후서 8장 1~15절


1. 주말에 읽으신 ‘고린도후서 6, 7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게 된 이유가 직접적으로 기록됩니다. 고린도전서가 다소 공격적 어투의 책망과 훈계였다면, 고린도후서는 부모의 심정으로 권면하는 느낌입니다. 마치, 혼난 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가 났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7장 8~11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사도 바울의 마음이 풀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회개 때문입니다. 그냥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회개였습니다. (7장 9~11절)

회개로 인한 마음의 깊은 고민, 자기 돌아봄, 애통함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한 근심과 마음의 찔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에 대한 근심은 사망을 가져오지만, 회개의 근심은 생명을 가져옵니다. 달리 말하면 회개가 없기에 세상의 근심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기록된 ‘연보’에 관한 것을 ‘회개한 심령’과 연결하지 않으면 종교적 차원의 ‘이웃돕기 격려’ 정도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는 민감합니다. 교회의 재정과 관련된 오해, 구설수, 불협화음은 항상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좋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조심한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이런저런 물질적 공헌이 있는 경우는 이런 부분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말도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할수록 말이 없고, 하지 않을수록 말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연보’의 많고 적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 심령, 중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자세로, 어떤 심령의 상태로, 어떤 중심의 모습으로 ‘연보’를 드렸는지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십자가에 자신을 드린 사람, 내가 아닌 내 안에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연보’를 드린 것만이 하나님께 인정된다고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주께 드렸다는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자아는 죽고, 나 대신 예수님이 사신다는 실존적 고백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9절로 이어지며 ‘연보’ 드리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로 연결합니다. 9절의 ‘부요하신 이’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걸 말하면서 “온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 것이다. 세상 물질도 다 하나님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 지으면 편협한 성경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 혹독함, 죽음’을 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생명 그 자체 이신 예수님께서 가난보다 더 혹독한 죽음을 택하심으로 생명의 부요함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3. 오늘 말씀을 참 많이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또 오해했는지 모릅니다. “극심한 가난.. 힘에 지나도록…” (2~3절) 그렇게 어떤 사람은 ‘집을 팔았습니다. 전세금을 뺐습니다. 통장을 깨기도 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참 많이 드렸습니다.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린 물질은 ‘성전 건축’이라는 핑계로 ‘건물 짓는 것’에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앞에 선 사람들, 집행한 사람들이 좋은 곳에 사용했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고 합니다. (12절) 그냥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마음’,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 받으신다고 합니다.

혹시, 자기가 타고난 성품이 나눔을 좋아해서 뭔가 드리는 것은 없습니까? 혹시, 종교적 직분 또는 주변 사람의 이목 때문에 이정도는 교회에 내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넘치도록 드리면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생각으로 갖다 받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도 과거엔 드리면 더 큰 것으로 채워 주실 줄 믿고 받친 적도 있습니다. 반대로 드리는 것이 아까워 이런 저런 핑계를 찾은 적도 있습니다. 또 여전히 가끔은 ‘목사라 이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엎드립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제 마음에서 올라오는 자아의 생각을 끊어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도, 드리고 싶지 않는 마음도 모두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진정한 내 본심이 무엇인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로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요함은 십자가의 가난함으로 더욱 빛났음을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생명의 떡, 진정한 만나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많음이 낭비가 되지 않고, 모자람이 궁핍이 되지 않는 은혜(15절, 출애굽16:18)’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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