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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2020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시편 37편 1~22절


1. 시편 37편의 큰 주제는 악의 문제와 현상을 두고 고민했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전반적인 시의 분위기는 누군가를 타이르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든 노년의 다윗이 젊은이 혹은 자녀들에게 조언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혜의 선생, 인생의 선배로써 하는 ‘충고, 권면’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도 악의 문제와 현상으로 씨름하며 고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으로 갈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시편 37편을 통해 악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말한 것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통해 톡톡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의 첫 시작인 1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를 잘 묵상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눈으로 읽고, 머리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자들의 악행과 불의’를 보면서 ‘불평과 시기’가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이유를 냉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불의’를 보면서 왜 불평과 시기의 마음이 생깁니까? 나는 선(善), 나는 정의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악한 저들을 향한 불평과 시키는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나(qanah)’는 ‘질투심, 시기심, 경쟁심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저들이 행하는 저 일들을 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올라간 저 자리, 저들이 가진 저 권력, 저들이 누리는 저 부와 명예를 내가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내가 최고여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도 나의 자아를 실현해줄 신적 존재로 이용해야 합니다.

‘악(惡)’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은 도덕, 윤리, 문화, 관습, 법률 등에서 말하는 ‘악한 행동’을 뛰어넘습니다.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아실현욕구’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아 지기 위해 선악과를 서슴지 않고 범한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신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악(惡)’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 이런 나의 본성이 떠오른다면, 이런 범죄한 나를 인정한다면 겨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겨우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3. 인간의 모든 ‘악행’은 그 심령에서 하나님을 싫어 버린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기독교 종교인들’입니다. 거룩으로 가장한 자기의 종교성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나 위에는 하나님만 있다.’라고 겸손한듯 교만하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읽으면 분명 달라 보입니다. 2절을 읽으며 “풀같이 베임 당하고, 쇠잔해질 사람은 바로 나다. 시편 36편 7~9절 말씀처럼 나도 ‘주의 날개 아래 피하지 않고,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지 않으며, 그 빛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인자하심에 붙들리지 않으면 내가 악인이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3~11절을 보면서 “여호와를 의뢰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땅을 차지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며, 형통하며, 하나님의 이루어 주심을 체험하며 살 줄 믿습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3절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3절을 원어에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라. 선을 행하라. 그 땅에 거하는 것과 그 신실함으로 목축 되는 것.”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그 땅에 거하는 것, 그 신실함으로 목축 되는 것(길러지는 것, 먹을 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결국, 9절에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1절에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역시 ‘여호와 하나나님의 신실하심 즉, 그 대속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22절의 “땅을 차지하고”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제발, 성경에 기록된 ‘땅’을 가지고, 딴소리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이용한 ‘종교 투기꾼’같은 소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할 때, 간절히 더 간절히 성령의 조명(빛 비추심)을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심령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죄성에 기울어진 내 눈과 마음으로 먼저 읽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로 통칭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저들, 하나님을 이용하며 사는 저들’을 향한 지나친 적개심은 내 속에 감춰진 ‘저들과 같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 인정되면 푸른 신호입니다. 그 푸른 신호를 따라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그 땅’에 거하게 됩니다. 네,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분 안에 거하며, 그 분의 신실함으로 목축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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