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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2020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시편 36편 1~12절


1. 시편 36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의 교만,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범죄한 인간의 교만과 불의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공의로우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함을 바라볼 때 탄식이 흘러나오지만, 그칠 줄 모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강한 열정이 찬송과 경배로 변화되는 것이 시편 36편의 영적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인’과 ‘의인’의 선악구도 속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의인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들은 교만한 악인이다.’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 의로우심’ 붙들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자는 바로 제 자신입니다. 저의 죄악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가리운 바 된 것일 뿐입니다.(시편 32:1)”라는 고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악인’ 즉,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 윤리, 관습, 문화, 상식, 통념, 법률 등으로 판단하는 죄를 범한 사람이 ‘악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규정하는 ‘악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의롭고, 착하고, 존경받으며 살았다’라는 자기 의로움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 됨’을 애써 덮어버리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자아의 어떠함으로 내면을 가리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기독교인’이라고 피해갈 수 없습니다. ‘잘 믿는다’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일 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종교와 윤리 행위를 통해 ‘상대적 의인’이라고 스스로 믿고, 자랑하는 ‘기독교 종교인’일 수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3. 저는 3~4절을 가만히 묵상하다가… 지금 다윗이 ‘다른 어떤 누군가’를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신을 쫓아다니던 ‘사울’을 대상으로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2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3~4절을 가만히 보십시오. 1~4절의 “그”는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악인은 나를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닌 사울, 나를 배신한 압살롬과 그 무리들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만 침상, 잠자리에서 죄악을 꾀합니까?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장소가 어디입니까? ‘왕의 침실(침상)’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올 때 했던 생각과 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계략을 꾸밀 때 사용한 머리 속의 생각과 내뱉은 언어들은 ‘죄악과 속임’이었습니다. 거짓과 음모의 거대한 산이었습니다.


4. 이런 말씀을 볼 때 여전이 ‘그들, 저들’이 생각난다면 ‘선악의 이분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알량한 자의식에 취해 ‘자기 의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영적인 태도로 행하는 ‘신앙생활’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종교생활에 닳을 대로 닳은 ‘영적 자갈’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 은혜가 스며들기는커녕 흘러내려 버려지게 됩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이 내 심령을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핑계 댈 수 없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5~10절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생명 아닌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손으로 움켜 잡을 것으로 만족감을 얻으려는 범죄한 내가 마셔야 할 ‘생명수가 흐르는 복락의 강’은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8절)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뒤덮어 쓰려고 했던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떠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해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9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부딪힌 죄인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정점인 십자가를 목숨보다 더 붙드는 사람은 ‘내가 참 교만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11절의 “교만한 자의 발”은 ‘뭔가 된 줄 착각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말씀을 대하며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것을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해내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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