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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2020년 금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시편 33편 1~22절


1. 시편 33편은 표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표제로 볼 때, 다윗이 기록한 시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시편’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시편은 구성에 있어서 편집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쓴 것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시인의 마음 자세입니다. 32편과 33편은 마음의 자세가 같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저 내 죄가 대속의 은혜로 가려진 것일 뿐이다.’라는 영혼의 겸손함을 붙들고 있습니다. 영혼의 자세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모든 시편과 성경의 기록자들의 마음의 자세는 같습니다.)

33편을 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자세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32편 1절의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에 심령을 붙들어 매야 합니다.


2. 그러면, 첫 시작인1절의 “의인들, 정직한 자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사람의 성품의 어떠함 입니까? 인간 행위의 이러 저러함 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 행위의 상대적 의로움, 정직함 수준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 말하는 ‘의인들, 정직한 자들’은 32편 1절과 직결됩니다. “의인들”은 “죄가 가려짐을 받은 자,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을 덧입은 것뿐인 자들입니다.”

“정직한 자들”은 “’나를 죄인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철저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가 아닙니다. 한 발 더 나아갈 것이 있습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은 ‘영적 우울증’에 사로 잡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2~3절의 “찬송과 감사, 즐거운 소리, 새 노래”로 연결됩니다. 죄인 됨의 고백 위에 임하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간은 여담입니다. 3절을 “찬송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부를 때, ‘새로운 음악적 기교와 기쁜 감정의 표출’로 찬양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큰 일 납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음악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명 ‘찬양사역자’들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납니까? 성경 말씀을 자신들이 행하는 ‘종교 음악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인간 본성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3절의 ‘새 노래’는 ‘영혼이 변화된 심령의 찬양’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로 대속의 은혜로 변화된 내 심령 혹은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에 대해 ‘시(詩)’로 적은 것, 그것을 읊은 것입니다.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 찬양을 지금의 음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약간의 운율이 있는 ‘시 낭송’ 수준이었습니다.

3.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별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힘’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영혼의 구원’을 ‘천국이라는 좋은 장소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절반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니, 6~12절도 ‘사람 수준’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폐하실 나라들의 계획, 민족들의 사상, 선택된 백성이 누릴 여호와의 계획’을 딱 사람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바라는 어떤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이라며 ‘종교로 세뇌된 생각’을 합니다. 거의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 스스로 대속의 제물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범죄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과 공의’를 동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받아야 할 죄에 대한 영원한

치욕과 고통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신 것을 말합니다.

4. 시편 33편이 ‘하나님이 스스로 제물 되심으로 이루신 구원’, 그 구원의 궁극인 ‘십자가’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15절의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함으로 죽은 영혼의 재창조, 새 생명 주심’을 강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16~17절 역시 성립이 안 됩니다. 18~22절의 영적 고백이 너무 뜬금없는 고백이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 종교에서 말하는 신적 존재로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자기를 대속의 제물로 드린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구원 개념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생명이 아니라, 종교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에 붙들린 바 되는 것’이 싫어지고, 지겨워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영적 실증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만만하게 봤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구원’을 다시 묵상합시다. 시편 33편을 32편과 연결하여 영혼의 눈으로 읽어봅시다. 천천히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며, 낮은 마음으로 대합시다.

시편 32편의 ‘허물과 자신의 죄가 가려진 은혜’를 철저히 붙든 사람, 그 은혜 때문에 ‘영적 겸손’에서 흘러나온 ‘삶과 인격 겸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본성에 대한 ‘영적 절망’을 십자가로 딛고 일어서 ‘예수 생명의 소망’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살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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