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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2020년 목요일 묵상

본문: 시편 32편 1~11절


1. 시편 32편은 4세기 ‘교부신학자’이자, ‘고백록(Confessions)’의 저자이며, 성자로 추앙 받았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가장 깊은 영감을 받았고, 사랑했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으나, 젊은 시절 철학에 심취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졌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았던, 그는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의 영향과 ‘로마서’를 묵상하며 ‘회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가 ‘시편 32편’을 가장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든지 이해가 됩니다.

분명, ‘어거스틴’은 1절의 고백을 제대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성자로 추앙받으며 초기 기독교의 교부(敎父)’로 존경을 받은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 삶의 스토리를 ‘간증거리’로 생각하며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덮어주시고, 숨겨주시고, 가려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살았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2. 위와 같은 영적 자세는 어제 함께 나눴던 묵상과 연결됩니다. ‘주의 은밀한 곳, 대속의 은혜로 덮어주시는 장막’에 숨기시고, 가려주시는 은혜가 ‘시편 32편’의 핵심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기독교,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가려주심, 덮어주심, 숨겨주심’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 사명 따라 부르심 등’ 갖은 종교용어와 종교구호로 포장하여 설치고, 으스대고, 드러냈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이라는 위대한 신앙인은 죄가 없다. 있어도 옛날이지 지금은 아니다.’라는 영적태도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여, 나는 죄인입니다. 가려주시는 은혜!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 나를 장악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없으면 난 또 넘어집니다.”라는 절실한 영혼의 고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3~4절은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고 고백하지 않았을 때의 영적 상태만을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죄성에 기울어진 나는 여호와의 대속의 은혜에 붙들린 바 되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간절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라는 말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더 엎드립니다.’라는 십자가 복음을 향한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3. 십자가 앞에 엎드려 ‘허물과 죄를 자복하고, 아뢰는 것’을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도덕적인 죄’를 범한 것을 회개하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십자가 복음’ 근처도 못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내 심령에 와 닿으면 ‘자기 의로움’에 가득 찬 ‘나 자신’이 보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성으로 똘똘 뭉친 ‘자아의 곧은 목’이 느껴집니다. ‘겸손하게 보이려고 겸손한 나, 존경받기 위해 존경받을 행위를 하는 나, 칭찬받기 위해 칭찬받을 행동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묵상하고, 십자가 복음을 대하면서 나 자신을 얼마나 깊이 들여 다 보았는가?”라고 말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깊이는 나 자신에 대한 영적 절망의 깊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영적 절망’ 앞에 서있는 사람은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영적 소망’을 붙잡게 됩니다.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4. 이런 저런 분주한 것들, 허망한 것들, 휘몰아치는 것들, 휘둘려 흘려가는 것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면, 좀 기다려보십시오. 영혼의 한 숨을 돌리기 위해 예수님께 물으십시오.

8~9절의 고백처럼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기 위해, 아니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내 생각에 가득차서 ‘고집 센 말이나 노새’처럼 굴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통제를 기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물리시고, 씌우시는 ‘재갈’과 ‘굴레’를 감사하십시오.

선악과를 범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은 ‘내 맘대로’입니다. ‘내가 주인 되는 삶’입니다. 사람의 종교심, 그 끝에는 ‘하나님이라는 신적 존재를 달래고, 얼러서, 그 위대한 능력을 이용하여 자아실현의 도구로 삼으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1절의 ‘의인들,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두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나를 십자가로 붙들어 주시고, 드러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범죄한 내 자아를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시는 은혜가 우리의 삶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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