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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2020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시편 31편 1~24절


1. ‘시편 31편’을 읽으며 시인(다윗)이 처한 상황을 유추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쫓겨 다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 추격하는 사람은 ‘사울 왕’이라는 것도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도 포함됩니다.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족속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 머리 속에는 ‘선한 다윗 vs 악한 저들(사울, 압살롬, 이방 족속 등)’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이런 시편을 읽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묵상합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은 선한 다윗, 의로운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의 손을 들어 주신다’라는 결론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다윗, 너는 사울’이라는 생각,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저들을 치시는 하나님’이라는 철썩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위에서 말한 저런 식의 종교 신념은 타종교를 믿은 신도들이 그들의 신(神)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저런 식의 단순한 선악구도를 가지고 호소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저런 식의 ‘자기 의로움에서 시작된 종교 신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했으니 나를 의롭게 여기시고, 나를 건져 주소서’가 절대 아닙니다. 신적 존재 혹은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어 억울함을 풀고,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뭔가 잘 풀리는 등의 일은 타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존재 혹은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이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입니까?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로움은 ‘대속의 은혜’입니다. 범죄 타락한 인간을 죄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반드시 값을 지불하시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되 스스로 제물 되심을 택하셨습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신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네, 하나님 밖에는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순종하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 없이는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 그럼 1절이 어떻게 보여야 합니까?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표현을 볼 때 더 이상 “하나님, 이 환란에서 내가 전능의 하나님께 피할 테니, 나를 공격하는 저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십시오. 하나님을 잘 믿는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식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라고 이름 지어진 신(神)을 믿는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견고한 바위, 구원의 산성, 반석(2~3절)’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초월자적 신분의 보디가드(?)’로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라는 범죄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하는 ‘속량(贖良)의 은혜’를 베푸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값을 지불하는 것조차, 궁극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림’으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은 자신을 향한 억울한 모함, 공격, 비방에 대한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지 않았습니다. 공격과 유혹에 반응하고, 넘어지고,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10절에서 분명하게 자신의 죄성과 죄악을 인정합니다.

죄악에 오염되고, 죄성에 기울어진 인간의 한계를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그토록 성공하려 하고, 가지려 하고, 움켜 쥐려는 이유는 ‘죄성, 욕망, 상처 등’으로 오염된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입니다.

다윗은 이런 인간 본성을 철저히 인정하고 깨달았기에 ‘왕의 권력과 부유함’이 아니라 ‘주의 은밀한 곳, 비밀히 장막에 감춰주소서’라고 고백합니다. (20절)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머무는 곳에 거하며, 덮어주시고, 가려주시는 은혜에 안에 살기를 바란 것입니다.

20절은 한글 번역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꾀,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심’을 ‘다윗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는 대적자 혹은 비방자의 비난, 모함 등’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꾀, 말 다툼(논쟁, 변명)’은 ‘죄인됨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든 도망치려 하고, 핑계 대려는 인간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추앙받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왕이라는 부와 권력으로 자아를 포장하려는 ‘범죄한 자기의 본성’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 두신 은혜, 주의 은밀한 곳, 여호와의 장막에 감춰짐(19~20절)’을 갈구할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쳤을 때! 왕의 부유함과 힘, 권력에 취해 그것이 자기를 가려주는 껍데기인 줄 착각했을 때! 무너졌습니다.

저는 23절을 보면서 다윗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말로 보였습니다. 아니, 자신을 공격하는 저들에게 한 말이라고 해도 ‘정신차리자. 나도 여호와의 대속의 은혜 놓치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며, 생명의 길임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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