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30편 1~12절
1. 시편 30편은 150편에 이르는 시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시편이라 여겨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문체의 아름다움 혹은 자연만물을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은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30편의 제목을 보십시오. ‘성전 낙성가’라고 기록합니다. 성전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성전이 왜 필요합니까?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죄 용서의 제사, 예배’를 드리기 위함 입니다.
성전은 종교 집회 장소가 아닙니다. 죄 용서를 구하는 곳입니다. 범죄한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 제물을 대신 드림으로 용서함 받는다는 ‘믿음’으로 나가는 곳입니다. 제물이 대신 드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함을 붙들어야 합니다. 대신 드려진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대속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편 37편’을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혹은 원수의 공격, 내외적 갈등 등으로 인해 죽음의 턱밑에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 사람이 찬가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神)’이라 불리는 초월적 존재의 도움으로 해결 받은 사람이 기쁨이라 표현되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런 것들과 다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어려움을 극복해주는 알 수 없는 능력’ 따위와는 격을 달리합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1절을 잘 묵상해야 합니다.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복수?해 주셔서 드리는 고백이 아닙니다. ‘원수가 나를 공격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공격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상황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사건은 발생합니다. 믿는 자에게도 믿지 않는 자에게도 ‘길흉화복 생노병사’의 상황이 닥칩니다.
절대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길흉화복 생노병사’가 없을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이 바로 ‘십자가’를 무당이 그려주는 부적으로 착각하는 무속적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믿음으로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거기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돌이켜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방관하고, 실수하고, 욕심부리고, 헤이 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엎드려 묻고, 주님이 주신 지혜로 다시 걸어 나가기도 하고, 돌이키기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런 믿음의 반응이 있을 때, ‘그 상황과 사건’을 통해 걸려 넘어지도록 ‘감정과 마음’을 요동치게 하려던 ‘원수 마귀’의 계략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수 마귀’가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저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구나’라고 절망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절망하고, 근심하는 유일한 때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실 때’뿐입니다. (7절)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는 이유’는 죄악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것이 괘씸해서 가 아닙니다. 죄악을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바라볼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십니다. 얼굴을 돌리십니다.’ 하지만, 얼굴을 돌린 채로 그대로 계시지 않습니다.
곧 덮으시고, 가려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대속의 은혜의 상징인 ‘피’로 덮으십니다. 대속죄일 제사장이 들고 들어간 ‘속죄제 염소’의 피로 ‘언약궤’를 뒤덮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속죄의 피’를 우리가 뒤집어쓰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속죄의 피’는 하나님 스스로 뒤집어쓰신 것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흘리신 피는 제일 먼저 예수님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흘러 덮였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마침내 죄인들을 덮는 피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는 것을 땅의 문제에 대한 해결, 승리, 회복, 치유 등으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스올’보다 더 깊은 ‘인간 죄성의 늪’에서 건지시기 위해 가장 먼저 ‘속죄의 피, 십자가의 보혈’로 자신을 덮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우리 죄악을 볼 수 없어 스스로를 ‘대속의 피’로 가리시고, 우리를 덮어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토록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문제가 보입니다. 보이고, 인정하면 살기 위해 내놓습니다.’
외부의 상황으로부터의 ‘건짐 받음’이 아니라, 죄악 된 나 자신으로부터 ‘건짐 받음’이 가장 우선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