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26편 1~12절
1. 오늘 본문인 ‘시편 26편’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과연 나는 이런 고백을 알 수 있을까, 감히 드릴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과 선량함,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속에는 구체적인 정황배경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이런저런 억울한 정황 때문에 쫓겨 다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1~5절 속에 나타난 ‘다윗의 당당함(?)’에 정당성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2.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선악구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다윗, 너는 사울’이라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선택 받은 자의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에 등장하는 ‘완전함, 판단, 뜻, 양심, 진리, 등등’의 단어를 ‘종교 도덕과 윤리’로 이해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인습, 관습, 문화, 도덕, 사상, 가치, 철학, 윤리 등’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핵심을 꼽으라면 7절의 “주의 기이한 일”입니다. “기이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파라(pala)’는 ‘평범함에서 구별되는 행위, 어떤 것 등’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통한 죄인의 용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용서와 구원입니다.
6~7절은 내가 무죄하기 때문에 ‘주의 제단’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이하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어놓으신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기에 ‘무죄하다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3. 이런 마음과 영혼의 자세를 가지고 ‘시편 26편’을 다시 천천히 묵상해보십시오. 다르게 다가옵니다. 종교윤리와 도덕에 속아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 마음으로 본문의 시작인 1~2절을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6~7절을 통해 깨달은 ‘영적 의미’ 안에서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의 ‘완전함’은 ‘사람 행위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말씀 드리는 ‘대속의 제사를 통한 속량의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죄인인 자기 의로움을 제물과 함께,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못 박는 것입니다.
따라서 1절에는 “내가 믿고, 붙들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 그 대속의 은혜’안에서 살았습니다. 흔들림 없이 그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절은 자기 행동과 행위에 자신이 있어서 ‘나를 살피고, 시험하고,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뜻”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킬야(kilyah)’는 ‘콩팥’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양심, 마음, 심장’으로 번역되는 ‘레브(leb)’와 함께 ‘인간의 내면, 속사람’ 등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콩팥’에 관하여 한가지 더 말합니다. ‘콩팥’은 ‘속사람의 죄악’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본성과 죄성이 거하는 영적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3~ 4장’의 ‘화제와 속죄제 규례’와 연결됩니다. 모든 것을 태워드리는 ‘속죄의 제사’에서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 등’은 ‘죄악’에 대한 영적 상징입니다.
특히, “단련하소서”로 번역된 ‘차라프(tsaraph)’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제련하다. 정제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차라프(tsaraph)는 ‘냄새를 맡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것(기름, 콩팥)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 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위기3:16)와 연결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편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완전함, 의로움’을 찬양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완전함을 노래했고, 그 은혜에 붙들려 평생 살아갈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가 진리이고 완전함’이기에 부끄러움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완전함에 붙들려 예수님께로 더 깊이 인도함 받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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