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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2022년 목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28일

본문: 요한복음 7장 53~8장 20절


1. 본문 7장 53절과 8장 11절은 ‘괄호’가 있습니다. ‘괄호’속의 내용이 없는 사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으로 성경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성경 사본과 번역본도 사람의 조작없이 정확히 전달되어 왔다는 증거입니다. ‘괄호’속의 내용이 없는 사본에 추가해도 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진 내용이 있습니다. 3~11절입니다. ‘음행 중 잡혀 온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의 비뚤어진 마음이 대비가 됩니다.

더 정확히는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여인’을 데려 다가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자리잡은 상대적인 의로움을 부추기려는 장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이면, 율법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선동하려 했습니다. 모두가 비난하는 대상을 끌어와서 자신들의 목적,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분리시키려는 수작을 부리려 한 것입니다(6절).


2. 인간이 이렇습니다. 내가 비난하는 대상을 남도 비난해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남도 싫어해 주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향이 조금도 없다면, 죄성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나의 죄성을 허용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자기 의로움에 기울어진 나에 대한 섬뜩할 정도의 자각이 있다면! 성령의 비춰 주심, 말씀의 거울을 통해 이런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기 의로움에 기울어진 자아를 못 박게 됩니다.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힐 내 자아의 기울어진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놓친 겁니다.


3. 예수님께서 바닥에 쓰신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다양한 설교자들의 상상을 통해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합니다. 다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닥에 쓴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귀에 들린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그 예수님의 음성이 자기 의로움에 가득 차 손에 돌을 든 군중의 마음에 울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양심에 가책(9절)”이라고 번역된 것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찔리는(?) 마음’정도가 아닙니다.

‘양심’이라고 번역한 ‘suneidesis’는 ‘무엇이 옳고 그른 지 구별하는 마음’입니다. ‘가책’이라고 번역한 ‘elegcho’는 ‘틀린 것을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판단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내가 틀렸구나!”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틀린 것보다 중요한 것은 틀린 것을 아는 것입니다. 틀렸을 때, 틀렸다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고백 위에 임하는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틀린 것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저는 오늘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이 말씀을 너무 잘 아는 제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습니다. 손에 돌멩이를 들고 던지지 않았을 뿐, 생각과 말, 눈빛 등으로 상대방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고, 던지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내가 하면 비판, 남이 하면 비난이라는 참 편리하고, 간사한 마음(양심)이 또 들켰습니다(가책)!

예수님은 이런 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죄 없으면 돌로 칠 수 있다. 그런데… 정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를 향한 비난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그 돌 내가 다 맞았다. 상대방을 향해 네가 들고 있는 그 돌 내가 대신 다 맞았다. 또 너를 향해 누군가 던질 돌도 내가 다 맞았다. 십자가에서 다 맞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하신 10~11절의 말씀도 그 내용입니다. 그냥 무작정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하니하노니(11절)” 속에는 “그 정죄의 돌을 내가 대신 다 맞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맞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자기 의로움에 가득 찬 군중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비난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 내가 맞을 돌멩이를 대신 맞으실 때, 먼저 돌을 던진 분이 있습니다. 네, ‘죄 없는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또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모든 저주를 끊어 내시기 위해 ‘죄 없는 하나님’께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 없는 분을 향해 저주의 돌멩이를 먼저 던지셨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이 어떠하건 오늘 우리 앞엔 ‘새로운 은혜, 십자가의 은혜!’가 있습니다. 지난 것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나를 덮칠 때, ‘십자가에서 나를 향한 저주의 돌멩이’를 대신 맞으신 예수님을 붙잡으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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