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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12일

본문: 요한복음 4장 1~14절

1. 요한복음 4장 1~2절은 앞의 내용(요한복음 2:13~3:36)과 더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전하시는 말씀을 ‘바리새인들’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몰라서 당한 것’이 아니라, ‘알고서 감당하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1~2절 같은 문학적 장치(?)가 ‘요한복음’의 결말에 이르렀을 때, 더 큰 감동과 이해를 주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을 같이 보고 들었으나 배격한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영접하고 믿은 것이 기적보다 더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3절 이하의 배경은 ‘사마리아’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더 경멸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민들입니다.

3~4절 속에 숨은 배경은 이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는 과거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 ‘남유다’ 사람들에게‘북이스라엘’사람들은 정치, 종교적으로 반역자였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과 달리 혼합정책을 썼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자신들이 정복한 피정복민족을 대거 이주시킵니다.

그 이후 ‘남유다’는 자신들만 민족적, 종교적 정통성을 유지했다는 우월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우월감은 결국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을 경멸과 저주의 대상으로 삼으며 점점 커져갔습니다.

만약, 4절의 기록을 당시 ‘유대인들’이 읽었다면 기절할 노릇입니다. 자신들이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지나는 것이 최단 거리임에도 둘러가는 길을 택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면,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이 상황에 주목해보십시오.)

특히,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먹을 것을 사러 ‘수가(Sychar)’로 가야하는 제자들(8절)은 난처함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심리상태였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이 본문을 기록하는 ‘사도 요한’에게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대화 내용은 더 충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종교화 해버린 ‘대속의 은혜’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회복’시키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6절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야곱의 우물(다시 목마른 물! 이스라엘 민족 종교의 상징)”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4. 게다가 ‘사도 요한’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누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그때는 도무지 몰랐습니다.

10절의 “하나님의 선물”이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이미 받은 은혜, 처음 은혜, 모세의 율법을 통해 주어진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도 요한’은 음식을 사러 가지 않고, 예수님 곁에서 이 모든 대화를 들었습니다. 기록의 상세함으로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내용을 기록하는 ‘사도 요한’의 마음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나도 몰랐고, 사마리아 여인도 몰랐습니다. 아니, 내가 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뭐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나보다 나았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무시했고, 멸시했던 그녀가 나보다 먼저 예수님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5. 들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죽은 나를 생명으로 품어 주신 은혜를 경험해야 가능합니다. 한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은혜는 단번영원 속죄이지만, 그 은혜를 믿고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힘은 주님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 그들의 지독한 자기 의로움에 바탕을 둔 선입견과 편견은 도덕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매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산다는 믿음의 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멈춘 사람들’이 아닙니다. 계속 변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십자가 은혜로 바뀐 나를 보며 깜짝 놀라게 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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